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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영화 남한산성 - 미장센 하나, 리더십 관점에서 본 남한산성

by mudbrick 2017.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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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출간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과 10년의 터울을 두고 영화 남한산성이 개봉했다.


영화의 소재가 된 남한산성은 약 400여년 전 그날의 시리고 아린 기억을 간직한 채, 조용히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을 영화화했기에 이 포스팅에서는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것은 소설 남한산성에 대한 독후감이나 도서 서평으로 대체할 것이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은 지난 번 포스팅을 참고하기 바란다.


2017/10/06 - [독서와 감상] - 영화 남한산성과 소설 남한산성의 공통점과 차이점


 

대신 주목해서 보면 재미있는 미장센 하나와 의사결정이라는 관점에서 본 영화에 대한 생각을 끄적여볼까 한다.


영화 남한산성에는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영화적 장치는 없다. 하지만 김훈 작가 특유의 묵직하고, 건조하고, 얼얼한 문체를 어느 정도 스크린에 옮겨 낸다.


소설과 영화라는 이야기 전달 매체의 차이도 어느 정도 극복해 낸다. 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다. 불필요한 부분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 영화는 그 완전체를 매체의 특성에 맞게 끊고 이어 붙였지만 이 또한 완전해보인다. 글로 표현된 소설 속의 정서는 영상으로 옮겨와 관객의 머리 속에 펼쳐진다.


명량과 같이 눈과 귀를 사로 잡을 전쟁, 전투 씬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묘당(廟堂)에서 울리는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엇물며 서로 떼뱀으로 뒤엉켜 어떤 총질이나 칼부림 보다 긴장감이 흐른다. 예조판서로 등장한 김윤석과 이조판서 역의 이병헌의 충심을 다한 논쟁은 선과 악이 명료하지 않은 현실을 압축한다.



이제 간략한 영화에 대한 평을 마치고 주목해야 할 미장센과 의사결정 관점에서 본 영화 남한산성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1. 주목해야 할 미장센 - 흑과 백

영화가 시작할 때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은 검은 색 도포를 입고 말은 탄 채 남한산성에서 나와 적진에 화친을 제의하는 사신으로 등장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은 흰색 도포를 입고 꽁꽁 얼어붙은 강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흑(黑)은 주화(主和)를 위해 산성을 나온다.


백(白)은 척화(斥和)를 위해 산성으로 들어간다. 

 

백이 삶이고 흑은 죽음인가? 흑이 삶이고 백이 죽음인가? 

백은 자존이고 흑은 치욕인가? 흑이 자존이고 백이 치욕인가? 


감독의 의도는 어땟는지 모르겠으나 영화 속에서 예판과 이판이 입고 있는 도포는 번갈아 흑과 백이 된다. 



삶과 죽음, 자존과 치욕은 그 끝이 엉켜 붙어 있다. 엉켜 붙어 있는 것을 떼어낼 수는 없다.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된다. 

 

감독은 흑색과 백색의 교차를 통해 생(生)과 사(死)가 공존하는 남한산성 속 묘당(廟堂)의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2. 의사결정 관점에서 본 남한산성

성공과 실패의 확률이 5대 5인 투자 품의가 올라왔다. 성공과 실패의 확률이 1대 9인 투자 품의가 올라왔다. 


당신이 현실 기업의 의사결정자라면 어떤 투자 품의가 더 리스크가 커 보이는가? 실패할 확률이 9인 후자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다. 실패할 확률이 9라면 투자를 하지 않으면 된다. 전혀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의 확률이 반반인 투자 품의는 위험하다. 어떤 결정도 쉽게 내릴 수 없다.



 

인조를 (주)조선이라는 기업의 CEO로 생각해보자. 이조 사업부장 최명길과 예조 사업부장 김상헌이 각각 자신이 이끌고 있는 사업부의 투자안을 들고 찾아왔다. 


(주)조선은 최근 몇년간의 사업 부진으로 사내 유보액이 거의 씨가 말랐다. 따라서 두 사업부의 투자안 중 하나만을 선택할 자원밖에 남아 있지 않다.

 

경영위원회에서 두 사업부장은 CEO를 앞에 두고 자신들의 투자안이 (주)조선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발표한다. 회의에 참석한 CFO를 포함한 다른 임원들은 모두 예조 사업부장의 발표에 표면적으로 찬성한다. 예조 사업부의 투자안이 장기적 지속 성장이라는 대의명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들 속으로는 이조 사업부의 투자안에 찬성한다. 그것은 단기적으로는 전 사업부의 실적 반등에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성장과 수익을 갉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이 무슨 상관이랴. 장기적으로는 모든 임원들이 회사에 없을 수도 있다. 단기적 성과가 자신들의 연말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CEO는 깊은 고심에 빠진다.



 

(주)조선이라는 가상의 기업을 상정했지만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모두 인조와 같은 현실과 마주한다. 어떤 의사결정을 앞두고 내면의 소리가 충돌한다. 그리고 차일피일 선택을 미룬다. 그렇게 한참을 끌다 결정을 내린다. 결과는 매번 어떠했는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인조는 의사결정자다. 예판과 이판, 두 충신이 왕 앞에서 논쟁한다. 영화 속 대사와 소설 속 두 신하의 대화가 거의 유사하기에 소설 속의 대화를 살펴 보는 것으로 영화 대사를 대신한다.

 

"전하, 적의 문서가 비록 무도하나 신들을 성 밖으로 청하고 있으니 아마도 화친할 뜻이 있을 것이옵니다. 적병이 성을 멀리서 둘러싸고 서둘러 취하려 하지 않음도 화친의 뜻일 것으로 헤아리옵니다. 글을 닦아서 응답할 일은 아니로되 신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말길을 트게 하소서."

 

"화친이라 함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논할 수 있는 것이온데, 지금 적들이 대병을 몰아 이처럼 깊이 들어왔으니 화친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심양에서 예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도 없으니 화친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화친으로 적을 대하는 형식을 삼더라도 지킴으로써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화和, 전戰, 수守는 다르지 않사옵니다. 적의 문서를 군병들 앞에서 불살라 보여서 싸우고 지키려는 뜻을 밝히소서."


"예판의 말은 말로써 옳으나 그 헤아림이 얕사옵니다. 화친을 형식으로 내세우면서 적이 성을 서둘러 취하지 않음은 성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뜻이온데, 앉아서 말라죽을 날을 기다릴 수는 없사옵니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아가 싸울 수 있겠사옵니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 더구나……"





 

"이거 보시오, 이판.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이고,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이며, 화해할 수 없는 때 화해하는 것은 화가 아니라 항降이오. 아시겠소?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요?"

 

"예판이 화해할 수 있는 때와 화해할 수 없는 때를 말하고 또 성의 내실을 말하나, 아직 내실이 남아 있을 때가 화친의 때이옵니다. 성 안이 다 마르고 시들면 어느 적이 스스로 무너질 상대와 화친을 도모하겠나이까."

 

"이판의 말은 몽매하여 본말이 뒤집힌 것이옵니다. 전이 본本이고 화가 말末이며 수는 실實이옵니다. 그러므로 전이 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옵니다. 더구나 천도가 전하께 부응하고, 전하께서 실덕失德하신 일이 없으시며 또 이만한 성에 의지하고 있으니 반드시 싸우고 지켜서 회복할 길이 있을 것이옵니다."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전하, 그만 할 일이 아니오니 신의 말을 막지 마옵소서. 장마가 지면 물이 한 골로 모이듯 말도 한 곳으로 쏠리는 것입니다. 성 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묘당의 말들은 이른바 대의로 쏠려서 사세를 돌보지 않으니, 대의를 말하는 목소리는 크고 사세를 살피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사세가 말과 맞지 않으면 산목숨이 어느 쪽을 좇아야 하겠습니까. 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 줄 아오나 상헌을 충렬의 반열에 올리시더라도 신의 뜻을 따라주시옵소서."

 

"묘당의 말들이 그동안 화친을 배척해 온 것은 말이 쏠린 것이 아니옵고 강토를 보전하고 군부를 지키려는 대의를 향해 공론이 아름답게 모인 것이옵니다. 뜻이 뚜렷하고 근본이 굳어야 사세를 살필 수 있을 것이온데, 명길이 저토록 조정의 의로운 공론을 업신여기고 종사를 호구虎口에 던지려 하니 명길이 과연 전하의 신하이옵니까?"

 

"전하, 적들이 성을 깨뜨리려 덤벼들면 사세는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옵니다. 전하, 늦추어야 할 일이 있고 당겨야 할 일이 있는 것이옵니다. 적의 공성을 늦추시고, 늦추시는 일을 당기옵소서.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우선 신들을 적진에 보내 말길을 열게 하소서. 지금 묘당이라 해도 오활한 유자의 찌꺼기들이옵고 비국 또한 다르지 않사옵니다. 헛된 말들은 소리가 크고 한 골로 쏠리는 법이옵니다. 중론을 묻지 마시고 오직 전하의 성단으로 결행하소서."

 



"명길의 몸에 군은이 깊어서 그 품계가 당상인데, 어가를 추운 산속에 모셔 놓고 어찌 임금에게 성단, 두 글자를 들이미는 것이옵니까. 화친은 불가하옵니다. 적들이 여기까지 소풍을 나온 것이겠습니까. 크게 한번 싸우는 기세를 보이지 않고 화 자를 먼저 꺼내 보이면 적들은 우리를 더욱 깔보고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해 올 것이옵니다. 무도한 문서를 성 안에 들인 수문장을 벌하시고 적의 문서를 불살라 군병들을 격발케 하옵소서. 애통해 하시는 교지를 성 밖으로 내보내 삼남과 양서兩西의 군사를 서둘러 부르셔야 하옵니다. 이백 년 종사가 신민을 가르쳐서 길렀으니 반드시 의분하는 창의의 무리들이 달려올 것입니다."

 

"상헌의 답답함이 저러하옵니다. 창의를 불러 모은다고 꼭 화친의 말길을 끊어야 하는 것이겠사옵니까. 군신이 함께 피를 흘리더라도 적게 흘리는 편이 이로울 터인데, 의를 세운다고 이利를 버려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묘당의 일을 성 안의 아이들도 알고 있는데, 조정이 화친하려는 기색을 보이면 성첩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옵니다. 화 자를 깃발로 내걸고 군병을 격발시키며 창의의 군사를 불러 모을 수 있겠사옵니까. 명길의 말은 의도 아니고 이도 아니옵니다. 명길은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하려는 자이옵니다."

 

미쳐버릴 노릇이다. 어느 누구 하나의 말이 틀림이 없다. 의사결정자는 어찌해야 하는가?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쟁 속에 답이 있다.

 

'중론을 묻지 마시고 오직 전하의 성단으로 결행하소서.'



 

결정을 미룬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결국 자신들이 아닌 외부의 힘이 개입하면서 모든 주도권과 결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인조는 살고 싶었으나 그 결정을 미룸으로서 죽은 것이다. 홀로 죽은 것이 아니라 조정의 모든 신료와 백성을 같이 떠안고 죽었다.

 

상황은 반반이다. 더 이상 수집할 수 있는 정보도 없었다. 인조는 결정을 빨리 내렸어야 했다. 결정을 빨리 내리고 그에 대한 후속 조치와 실행 계획을 마련해 뚝심 있게 밀어부쳤어야 했다. 그래야 비록 결정이 잘못되었더라도 스스로 보완할 여력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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