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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독후감 11. 『남한산성』- 서날쇠와 이시백과 칸의 편에서

by mudbrick 2017.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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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나서 최명길과 김상헌으로 대변되는 주화파와 척화파의 극한 대립 속에서 나는 과연 어느 쪽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을 것이다


또한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지 400 전에 일어난 비참함에 스스로를 던져 놓고 답을 찾아보려 애썼다400 뒤에 태어난 자의 여유로움은 생각의 진전을 막았다


청의 기병과 화포 앞에 벼루로 쌓은 성벽 안에서 대신 부여잡은 붓이 일으키는 ()먼지를 뚫고 쉽사리 답을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답을 찾기 힘들 우리는 질문을 의심해야 한다. 질문이 바로 서야 답이 명료해진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이우진이 자신을 ' 풀어주었을까'라는 잘못된 질문을 한다. 답을 찾을 있는 제대로된 질문은 이우진의 말처럼 ' 가뒀을까'.



 

질문을 다시 해보기 위해 작가를 먼저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역사를 기반으로 다시 창조한 작은 공간을 그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를 이해하면 질문을 다시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나는 내 글로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해야겠다는 목표나 그런 허영심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럼 왜 글을 쓰느냐. 나는 오직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이 있어요. 


나 자신의 진실 나의 슬픔과 고통과 기쁨과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과 추함, 내가 느끼는 악과 억압 이런 것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고. 


또 하나의 소망은 내가 나의 진실을 표현함으로써 그것을 남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소망도 사실은 있어요. 없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이 이해받지 못한다면은 그 또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선 나를 정확하고 과장 없이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죠.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출간하고 2015 10 8 JTBC 뉴스룸 인터뷰 그가 말이다.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녹인다는 말이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작가가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문학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다


거창한 거대 담론이 개개인의 구체적 위에 군림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다소설 남한산성에도 아마 이런 생각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각자의 대의(大義) 내세운 최명길과 김상헌의 '당신은 어느 쪽이오'라는 질문은 틀렸다


산성을 기준으로 어느 쪽이 삶의 길이냐 묻는 최명길과 김상헌 모두 그르다


붓을 사람들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는 상황은 작가를 '표현'해내지 못한다.

 



다시 그의 생각에 다가가 보기로 했다


2015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 2년의 시간이 지나 영화 남한산성 개봉했고 작가가 다시 손석희와 마주 했다.

 

<손석희> 

남한산성 쓰시면서 서날쇠가 나온 대목이 가장 신났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고수 씨가 맡아서, 제가 보기에는 고수 씨가 오랜만에 적역을 맡은 거 같기는 한데 왜 어떤 면이, 서날쇠의 어떤 면이 작가에게 기쁨을 줬습니까?

 

<김훈>

서날쇠는 성 안에서 말하자면 신분이 낮은 천민, 이런 소리는 하면 안 되는데, 하여튼 신분이 낮은 사람이죠. 그런데 그 사람은 애국자가 아니에요. 


이 사람은 이념화된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생활인이에요, 생활인. 


자기 처자식, 자기 농토, 자기 대장간을 하는 사람이죠. 그러나 가장 건강하고 충직한 시민이죠, 그 사람이. 


그러니까 나는 위정자들이 국민들에게 과도한 애국성을 요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국민들은 이념화된 애국심보다는 자기의 생활, 자기의 농토, 자기 처자식, 자기 생업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업에 충실하는 것이 결국 애국으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그런 틀을 만들어주는 게 위정자의 역할이지. 


이념화된 애국심을 자꾸 주입시켜서 하면 그것은 우리가 과거에 겪은 충효사상, 그런 것밖에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그 서날쇠라는 인물을 특별히 공을 들여서 묘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질문을 다시 하기로 했다.


"'대장간의 서날쇠, 수어사 이시백, 그리고 청나라의 '  '최명길과 김상헌' 중에 당신은 어느 쪽이오"

 


서날쇠, 이시백, 칸

vs

최명길, 김상헌

 



 


1. 서날쇠


소설 속에서 작가는 서날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서날쇠는 눈썰미가 매서운 대장장이였다. 


쇠를 녹이고 두드려서 농장기와 병장기를 만들었고, 목수들의 연장까지 만들었다. 


왼손잡이 목수들이나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나간 석수들을 위해 그 일그러진 손에 맞는 대패며 끌, 징, 송곳, 톱을 만들었다. 


깎고 쪼고 뚫고 파고 훑고 후비고 깨고 베고 거두고 찧고 빻고 밀고 당기는 모든 연장들이 서날쇠의 대장간에서 나왔다. 


서날쇠는 연장을 구하러 온 사람의 몸매와 근력, 팔다리의 길이와 허리의 곧고 굽음을 잘 살펴서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키 작은 자와 키 큰 자의 연장을 달리 만들어주었다. 


돌이 많은 땅의 호미와 모래밭의 호미도 달리 만들었다. 


서날쇠는 자신이 만든 연장에 이름의 가운데 글자인 날 생生 자를 새겨 넣었다. 사람들은 서날쇠의 연장을 생쇠라고 불렀다. 생쇠는 인근 고을의 관아와 민촌과 절간에 퍼져 나갔다. 


서날쇠는 양평에까지 소달구지를 보내 참나무를 실어 와서 땔나무로 쓰거나 숯을 구워 냈다. 


그의 불은 고요하면서 맹렬했고 맑아서 연기가 나지 않았다.

 


대장간이라는 터전에서 그는 쇠라는 구체적 질료를 두드리고 펴서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는 충직한 시민이다


자신의 생업에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한다. 근거로 자신이 만든 연장에 생生자를 새겨넣는다


보잘 없어보일 있는 일이지만 그의 생업은 실제로 이웃의 삶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작가 김훈은 그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망치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망치로 못대가리를 때려서 차츰 나무 속으로 밀어넣을 때, 나무의 여러 질감들 - 나무마다 못이 박히는 질감은 다르다 -이 내 몸속에 와서 내 몸의 일부가 된다. 


바싹 마른 나무에 못을 박을 때는 너무 세게 때리면 나무가 뽀개진다. 나는 그렇게 해서 나무를 이해하게 된다. 


이 이해는 분석되거나 재구성되지 않는다. 나무의 질감은 체험됨으로써만 이해된다. 


나는 망치로 못을 박는 순간에만 이 이해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못박기를 끝내면 이해의 기쁨은 소멸한다. 


그래서 못을 박는 일은 악기를 연주하는 일과 같다. 그러니 못이 휠 때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크다.

 

그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담배 연기처럼 손에 잡을 없는 형이상학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래서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망치질' 하나 제대로 못해 못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서날쇠는 임금이 오기 전에도 자신의 생업인 쇠를 묵묵히 두드렸다


작은 산성 속에서 백성들의 노역 없이는 끼도 해결할 없는 조정 대신들의 () 오갈 때에도 서날쇠는 묵묵히 자신의 생업인 쇠를 깍았다


죽어서 나간 것인지 살아서 나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임금이 산성을 나간 후에도 그곳에서 자신의 생업을 이어간다. 

 

 

 

 

2. 이시백


소설 속에서 작가는 최명길과의 대화를 통해 이시백을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수어사는 어느 쪽이오?”  

 

이시백이 대답했다.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  

 

최명길의 목구멍 안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조선에 그대 같은 자가 백 명만 있었던들…….’

 

수어사 이시백에게 묘당의 대의와 명분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체찰사(體察使) 겸하고 있던 영의정 김류가 싸움의 형식 속에서 투항의 내용을 키워갈 때도 그는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의 역할을 수행했다.

 

영의정 김류를 포함한 고관대작들의 붓이 휘어져 무엇이 애국인지를 논하고 있을 , 수어사 이시백의 칼은 곧게 서서 삶을 지켰다.

 

 

 

3. 


소설 속에서 작가는 청의 홍타이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사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늘 말했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칸의 나라는 () 먼지가 아닌 ()먼지 속에서 강성했다칸의 문장은 거침없이 창으로 범을 찌르듯 달려든다


그런 그에게 조선의 말은 이해할 없는 궤변이다


삶을 구걸하면서도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요사스럽기 그지없다. 

 

그는 조선 왕이 보낸 문서를 내던지며 말한다.

 

"조선의 말이 사특하다.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이냐?”  

 

용골대는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말하라. 너희들은 알겠느냐? 나는 모르겠다. 이것이 뭐라고 해대는 말이냐?”

 

 

작가는 고매한 관념으로 지고지순한 헛소리를 하느라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칸의 입을 빌려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한산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해보자.

 

위정자는 () 명분으로 서날쇠를 사지로 보내 군사를 모아 포위를 풀고자 했다


위정자는 () 명분으로 이시백에게 곤장을 쳤다


그러면서 위정자는 으스러지는 말들로 앞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렸다. 

 

나는 이제 최명길과 김상헌, 그리고 다른 모든 조정 대신들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정치적 언어의 허망함 쪽이 아니라 서날쇠와 이시백과 칸의 명료함 쪽이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뻔뻔한 보다는 서날쇠의 손에 쥐어진 생업을 위한 망치와, 이시백의 손에 쥐어진 휘지 않은 곧은 , 그리고 혼탁하지 않은 칸의 말을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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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학고재 201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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